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어 전쟁 (문단 편집) == 제2차 보어 전쟁 == ||||||<:> {{{+1 '''제2차 보어 전쟁''' Second Boer War Die Tweede Vryheidsoorlog}}} || ||||||<:> '''날짜''' || ||||||<:> [[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31일]] || ||||||<:> '''장소''' || ||||||<:> 트란스발 공화국 || ||<:> '''교전국'''|| [[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대영제국]]''' ||[[파일: 오라녜 자유국 국기.svg|width=23]] [[오라녜 자유국]][br][[파일:트란스발 공화국 국기.svg|width=23]] [[트란스발 공화국]][br]다국적 의용군 || || '''병력''' || 600000명 || 67400명 || || '''피해규모'''|| ~99284명 || ~6189명 || ||||||<:> '''결과''' || |||||| 영국의 승리 || 국가 차원은 아니지만 트란스발 공화국을 지원한 해외 자원참전병들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2천명, [[독일 제국]]이 550명, [[프랑스 제3공화국]]이 400명, [[미국]]이 300명, [[이탈리아 왕국]]이 250명, [[러시아령 폴란드]]가 225명, [[영국령 아일랜드]]가 200명, [[스웨덴-노르웨이]]에서 150명, [[러시아 제국]]에서 100명 정도가 보어인들을 지원해 참전했다. 일부 [[호주]]인들도 보어를 편들어 참전했다. 제2차 보어 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발생했다. 20년 전의 전쟁과 달리 금광 등의 이유로 더 많은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 등에서는 영국인과 영국이 데려온 인도인 등 외국인들이 보어인들보다 더 많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주류세력인 보어인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이를 구실로 [[세실 로즈]] 등의 제국주의자들은 보어 정부를 뒤엎을 [[쿠데타]] 등을 꾸미기도 했다. 1895년에 일어났던 제임슨 습격 사건(Jameson Raid)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로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준비되어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결국 봉기하지 않았고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덕분에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었지만,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이 쿠데타 시도를 두고 크뤼거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어를 치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가 바로 크뤼거 전보(Krüger Telegram) 사건이다. 전보가 더 타임스에 실리자 영국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독감정의 물결을 형성했으며 심지어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1899년 9월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영국인을 트란스발의 자국민과 평등히 대하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내나 트란스발은 케이프 등에 주둔한 영국군에게 48시간 내에 퇴각하라는 최후통첩으로 답했다. 1차 보어전쟁에서 승리한 후 당연히 영국이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보어측은 금과 보석 판 돈으로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고, 여기엔 크루프 야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899년 10월 12일 보어인들은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등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으며 특히 12월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의 주요 전략은 전열을 갖춘 보병들의 횡대 전략이었는데 보어인들은 [[민병대]] 위주의 기병부대여서 진형을 짜지 않고 영국군에게 접근해서 지형을 이용한 기습을 가했다.[* 특히 보어인들은 게릴라 저격전술로 영국군을 사냥했다. "저격수 보이지 않는 공포"에 해당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12월 10일 스톰버그(Stormberg) 전투에서 영국군은 오라녜 자유국군과 충돌하여 135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2월 11일엔 1만4천명의 영국군이 킴벌리 공략을 펼쳤으나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보어군에게 당해 120명의 전사자를 냈다. 12월 15일 콜렌조(Colenso)의 피해는 막대했는데 2만1천명의 영국군이 레이디스미스(Ladysmith)를 탈환하기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던 중에 포격 등에 노출되어 1127명이 전사했다. 이 일로 영국에선 대규모 애국주의 광풍이 불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국은 [[미국]]과 [[독일 제국]]의 등장으로 차차 쇠퇴해가던 시절이었는데 그 반작용으로 보어 전쟁엔 엄청나게 관심이 집중됐다. 말하자면 미국한테 밀리고 독일한테 밀릴지언정, 보어한테만은 그럴 수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브리튼 본토의 요먼까지 징집하는 반 총력전 태세를 갖춘 영국은 1900년이 되자 영국은 7만 보어군을 상대로 45만대군 을 동원해 대규모 [[인해전술]]을 펼친다. 브리튼에서 온 대규모 증원군이 케이프타운에 상륙, 3로 공세를 펼치며 대영제국이 진지하게 제대로 나섰으니 이제 보어는 끝장...이라는 기세도 잠시. 3곳 모두에서 패배한다. 1900년 1월 영국군은 스피온 콥 전투(Battle of Spion Kop)에서 대패했다.[* [[리버풀 FC|리버풀]]의 서포터즈 이름 '콥'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유는 이 전투에서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 당시 영국군의 지휘관은 찰스 워렌이었는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찰스 워렌은 유명한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런던 경찰 총책임자였는데 이 때도 엉터리 같은 행동으로 수사에 지대한 어려움을 끼쳤다. 결국 이런 비난 속에 1905년 해임되어 한직이나 돌아다니며 3년 뒤 사임하고 이후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벌이고 책[* 자서전을 썼지만 말이 자서전이지 본인이 벌인 실책을 변명하던 것에 불과하다.]이나 쓰다가 삶을 마감했는데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장수]]했다. 이 전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 산이 아닌가봐"'''로 정리할 수 있다. 찰스 워렌은 위에 언급한 레이디스미스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인 스피온 콥을 확보하도록 했다. 병력이 야간에 안개를 틈타서 산을 올라서 진지를 펴고 보니 정작 스피온 콥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고, 그곳은 보어군의 포병 부대[* 보어군은 특성상 민병대의 비율이 높아서 군복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포병부대는 보어군 부대 중 유일하게 전 장병이 제복을 제대로 갖춘 부대였다.]가 사전에 조준하고 있던 곳이었다. 독일제 화포로 무장한 보어군 부대는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화포는 신형 무연화약을 사용해서 발사시 연기가 나지 않아 영국군은 화약 연기를 이용해서 좌표를 추적할 수 없었고, 결과는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흘러갔다. 금과 다이아몬드 등을 독일산 무기 사는데 탁탁 털어넣은 결과였다. 이 와중에도 워렌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이 당시 일화로 종군 기자이자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 참전했던 [[윈스턴 처칠]]이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데 뭐라도 하시라"고 말하자 워렌은 쓸데없이 간섭한다며 처칠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우군인 스코틀랜드 여단의 우회 공격과 탄약 부족으로 보어군이 슬슬 철수하려 할 즈음에야 워렌은 병력을 철수시킨다. 이 당시 보어군의 피해는 전사자 68명, 부상자 267명인데 반해 영국군은 전사 243명, 부상자 1,250명으로 영국군의 완패였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잊지 못한 처칠이 신나게 기사를 써 워렌의 무능이라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도하여 워렌은 무진장 욕먹고 군직에서 잘려 경찰로 들어가야 했다.--그렇게 신나게 기사 써댄 사람도 해군장관이 된 후 [[갈리폴리]]에서 피해 규모로 더 엄청난 패배를 당하며 죽을 때까지 그걸로 욕먹게 되었다-- 하지만 찰스 워렌의 실책은 변명의 여지가 있다. 첫번째, '이 산이 아닌가봐' 식으로 전혀 엉뚱한 고지로 올라갔다고 주장하지만, 영문위키나 "The Boer War: A History" (Denis Judd, Keith Surridge) 책의 설명을 보면 둘다 한결같이 찰스 워렌의 영국군은 야간에 제대로 Spion Kop 을 올라갔고 그곳을 지키는 보어인 민병대를 기습 공격으로 밀어내고 점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영국군이 실제로는 Spion Kop 의 일부, 그것도 보어인 민병대의 사격에 노출되는 높이가 낮은 일부만을 점령했지만, Spion Kop 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착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As dawn broke, the British discovered that they held only the smaller and lower part of the hilltop of Spion Kop, while the Boers occupied higher ground on three sides of the British position. 영문위키 원문에서 발췌] 그것도 엄청난 실수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Spion Kop 전투가 벌어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 년도 더 넘은 정확하게 1900 년이었다. 오늘날처럼 GPS 나 야간 조명탄 같은 것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당시 시대나 상황을 고려하면 지도가 준비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현지 가이드의 인솔 혹은 기껏 정찰병이 스케치한 조잡한 지도에 의존해서 싸워야 했다.] 게다가 Spion Kop 점령 자체가 야간에 기습 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횃불 등으로 시야를 충분히 밝힐 수 있을거 같았지만 없었다. '''결정적으로 Spion Kop 점령을 인솔한 사람은 찰스 워렌이 아니었다.''' 찰스 워렌은 사단장(중장)이었는데 사단장이 직접 고지 점령을 인솔했겠는가? Spion Kop 점령은 찰스 워렌 휘하의 Edward Woodgate 소장이 이끄는 부대가 맡았다. [* 물론 당연히 Edward Woodgate 소장도 Spion Kop 점령을 직접 인솔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 관계를 싹 빼고 무능한 찰스 워렌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병력을 이끌고 올라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명백한 악의적인 왜곡이며, 허무맹랑한 카더라 얘기들이 나무위키에 버젓히 사실인양 적혀있을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둘째, 윈스턴 처칠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하자 찰스 워렌이 처칠을 끌어낸 일은 욕먹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애초에 민간 특파원으로 남아프리카에 왔고, 1900 년에야 현지에서 장교로 입대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높은 계급이 아닌 중위 계급이었다.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기껏 연락 장교 역할을 하고 있던 새파란 중위 따위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단장(중장)에게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 아닌가? 찰스 워렌이 무능하니 어쩌니 해도, 만약 그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걸 찰스 워렌을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쓴다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물론 찰스 워렌이 무능력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실제 전쟁에서 지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찰스 워렌에게 중책을 맡긴 것부터가 영국의 실수. 또한 찰스 워렌은 Spion Kop 의 영국군을 과감하게 철수시킨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양동작전을 펴면서 Spion Kop 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소극적으로 지원 병력을 Spion Kop 으로 축차투입하기만 했고, 그 결과 불리한 상황에서 교전을 지속했던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게 찰스 워렌의 진짜 잘못 중 하나다.] 하지만 찰스 워렌이 Spion Kop 전투 몇 개월 후 본국으로 소환당한 것이 단지 무능이라고 하기에는 2 차 보어 전쟁 초반 영국군의 삽질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Magersfontein 전투에서는 Lord Methuen 은 정찰이 제대로 되지 못했음에도 당연히 보어인 민병대는 Magersfontein 언덕 정상에 있겠거니 하면서 공격을 밀어붙였고, 새벽 공격을 위해 야간에 밀집 대형으로 이동하던 영국군은 언덕 초입에 매복한 보어인 민병대의 포화에 노출되면서 시작부터 공격 부대 지휘관 Andrew Gilbert Wauchope 소장이 전사하는 개망신과 참패를 겪었다. 찰스 워렌의 무능이 Methuen 의 무능보다 더 나빴나? 글쎄. 하지만 Methuen 은 안짤렸다. 이것만 보더라도 찰스 워렌이 짤린 것은 단순한 무능 때문이 아니라, 실전 경험이 부족한 찰스 워렌의 백그라운드 약점, 상관인 Redvers Buller 와의 불화, 처칠이 언론을 통해 일으킨 비난 여론에 대한 희생양으로 던져주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 그런데 위에서 잭 리퍼 사건도 찰스 워렌의 무능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후의 공정한 평가를 참고하면 이것도 사실은 찰스 워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했는데 범인이 안잡혀서 그냥 욕받이 무녀가 된 것에 가깝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Boercamp1.jpg]] 이후 반격하는 과정에서 영국군들은 보어인 게릴라가 발붙일 곳을 없애기 위해 집결캠프[* '''강제수용소'''의 시초로 본다.]를 세워 12만명의 보어인을 강제 수용했는데[* 당연히 원래 보어인들이 살던 집과 농장은 불태웠다], 강제수용소에서 27,927명의 보어인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이 중 22,074명은 16세 이하였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흑인들도 14,154명이 기아로 사망했는데 보어인들에게는 영국을 편든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는 보어인들을 편든다는 이유로 동네북, 혹은 고래싸움의 새우등 신세로 죽어나갔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b/ba/LizzieVanZyl.jpg/800px-LizzieVanZyl.jpg|사진 촬영 후 바로 사망한 보어인 소녀. 보기에 따라 끔찍하니 클릭시 주의할 것.]] 영국 본국에서조차 같은 기독교인 백인을 이렇게 죽이냐며 반발이 많았다. --흑인이 죽은 건 모른 척 했다-- 이런 반발 속에서 영국군을 옹호하는 글을 쓴 게 바로 [[아서 코난 도일]]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하술. 다만 14,000여명이 넘는 영국군도 전투가 아닌 질병으로 사망했다. 또한 아프리카의 더위에 군마들이 픽픽 쓰러지는 통이라 60만 마리를 실어날라야 했다. 1900년 9월에 이르러 영국은 트란스발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보어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맞서게 된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초토화 작전으로 나간다. 1902년 5월에 보어는 항복하고 두 공화국은 소멸하여 남아프리카의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승리하긴 하였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강제수용소와 초토화 작전으로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당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을 동맹국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맺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트란스발 공화국의 폴 크뤼거 대통령은 1900년 유럽으로 떠나 보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트란스발로 돌아오지 않고 망명했다. 1904년 78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사망한 후 그의 시체는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프라토리아에 묻혔다. 영국은 [[1910년]]에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땅을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출범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